Granovetter, Mark. 1985. "Economic Action and Social Structure: The Problem of Embeddedness,"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91 (3): 481-510



[2021-1학기 경제와사회 발제 2주차]

  1. Granovetter. 1985. "Economic Action and Social Structure: The Problem of Embeddedness"

김기성

그라노베터는 경제적 현상을 다루는 사회학적인 개념으로서 배태성(embeddedness)의 개념을 제시한다. 배태성의 개념은 이미 전근대 및 비서구사회의 경제활동에 대한 인류학, 역사학의 연구자, 폴라니 등의 실재론자(substantivist)에게서 발견되는 개념으로, 저자는 이 개념을 적극적으로 가져와 경제적 활동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에 활용한다. 그는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의 인간에 대한 이해를 “과소사회화된(undersocialized)” 것이라 비판하고, 한편 소속집단이나 사회적 지위 혹은 정체성 등 구조적 요인에 경제활동이 종속된 것이라고 보는 일부 사회학자 및 경제학자의 관점 역시 “과대사회화된(oversocialized)” 것이라 비판한다. 과소사회화되었다는 건, 경제적 행위자들을 역사적, 사회적, 관계적 맥락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원자화된 개인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며, 과대사회화되었다는 것은 행위자를 사회적 영향력으로부터 기계적이고 자동적인 영향을 받아 그것을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따르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그라노베터는 이 양극단의 접근이 오히려 맞닿아 있다고 보며, 두 입장 모두에서 개인이 진행 중인 사회적 관계의 일부로서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라는 점을 간과한다고 본다. 그는 이러한 이론적 추상화가 갖는 한계를 지적하기 위해 배태성의 개념을 활용하고 있으며, 이 글에서는 신뢰와 부정행위(malfeasance), 그리고 시장과 조직에서의 위계(hierarchy)라는 사회적 현상을 조명한다. 윌리엄슨의 <시장과 위계(Markets and Hierarchies)>를 기축으로 삼아 사회적 관계의 한 유형으로서 위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윌리엄슨에 접근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는데, 기업 내 구조, 즉 수직적으로 통합된 기업(vertically integrated firm)의 구조가 작동하는 방식은 내생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다양한 복잡성과 다이나믹스가 발생하는 곳으로 보았으며 기업 내 사회적 관계 이외에도 기업 간 사회적 관계 역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고 논한다. 그는 글을 마무리하며, 비록 경제학에서 가정하는 합리적 행위자 가정이 한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이 가설이 갖는 유용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배태성 개념이 폴라니와 그의 저서에서 인용되는 인류학적 사례들에서 발견되긴 하지만, 그 용례는 근대 서구 이외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경제활동이 어떻게 사회적 관계나 현상에 묻어 들어 있는가에 초점을 맞춘 것에 가깝다. 폴라니의 저서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의 주요 논지는 어떻게 18~19세기의 유럽에 자기조정적 시장이 출현하게 되었는지를 규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이미 근대사회에서는 자기조정적 시장, 곧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이 가정하는 합리적 행위자와 그들의 거래 관계의 실재 자체는 일견 인정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라노베터는 20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목격하는 현대사회의 경제 현상 역시 전근대 사회와 단절된 "합리적 체제(rational system)"로만 설명될 수 없으며, 과대사회화와 과소사회화 사이에서 사회화 과정 자체를 설명하고자 배태성의 개념을 적극 차용한다.

오히려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라노베터가 "합리적 행위"의 가설의 상당한 유용성을 인정하는 점이다. 비록 제도에서부터 관습, 사회적 관계, 지위, 권력, 정체성 등으로 인해 한계를 갖더라도, 이들을 떼어내고 보면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행위, 곧 원자화된 개인의 합리적 이익 추구라는 이념형은 예측과 설명에 상당한 타당성을 갖는다고 본다. 그러나, "합리적" 행위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기업의 이윤추구나, 개인의 부(wealth)나 효용(utility)의 최대화 등을 과연 "과소(under-)" 사회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용어를 직관적으로 받아들이자면, 개인이 사회로부터 덜 영향을 받을 때에 그들은 부나 이윤, 효용을 추구하는 행위자일 것이라는 기저 가정(bottom line)이다. 그러나 이윤이나 부, 심지어는 효용의 추구마저도 보통 사회적인 의미를 갖는다. 가령 이익, 특히 경제적 이익의 추구가 본질적이거나 내재적이라는 것 역시 당연한 전제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다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닌가. 소득이나 자산, 혹은 효용의 의미는 그것이 통용되는 사회적 조건에 따라 상이하지 않은가.

이윤 혹은 이익을 추구한다는 인간의 행위 경향 역시 사회적 속성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이는 이윤이나 이익의 추구가 인간의 삶 및 행동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되묻는 과정이기도 하다. 개인에게 이윤으로서 대표적으로 상정되는 소득을 예로 들어보자. 개인에게 소득의 의미는 재화나 서비스, 주거공간 등의 소비에 사용하기 위해 필요한 일종의 삶의 안전망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나 소득의 의미는, 그 삶을 구성하는 여러 요인들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배열되어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가령 제도적 구성(대표적으로 사회정책)이 사람들의 복지 충족에 어떤 기능을 하느냐에 따라 소득의 중요성은 달라질 것이다. 사회적 위험(social risk)에 처했을 때, 복지를 실현할 수 있는 기능이 얼마나 사사화(privatized)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소득의 중요성은 달라질 것이며, 해당 사회적 위험이 개인에게 얼마나 더 심각하고 있을법한(likely) 것으로 다가오느냐 역시 그 중요성을 바꿔놓을 것이다. 또한 미래의 삶, 그리고 삶을 둘러싼 사회적 조건이 얼마나 긍정적일지(가령 세상은 더 좋아지고 있는지, 미래에 더 풍요로운 세상 혹은 더 위험한 세상이 올 것인지)에 따라서 역시 소득의 중요성이 달라질 수 있다. 덧붙여,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실제의 미래 혹은 해당 사회가 "그러한 것" 역시 다를 수 있다. 누군가는 자신이 빈곤의 지위에 떨어질 리가 없다고 생각하여 소득의 의미가 덜 중요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그 사람이 빈곤에 손쉽게 떨어질 수도 있다. 누군가는 자신의 노년의 생계가 되게 암울하다고 생각하여 누구보다 열심히 자산을 축적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 사람의 노년을 둘러싼 사회적 조건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유형화하고 추상화하여 개인을 과소사회화 혹은 "경제학적으로 사회화(economically socialized)"된 존재로서의 특징을 고수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만큼의 그것이 "실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학은 어떤 "독특한 현상"의 발생에 대해 규명하는 학문이면서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의 사회적 기원에 대해 접근하는 학문일 것이므로, 이 둘 사이의 경계를 탐구하는 것이 요구된다.